구형왕릉

왕조의 마지막 순간 구형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락국(가야)마지막 왕 구형왕의 능을 찾아서[구형왕릉]

국내 유일의 돌로 쌓은 왕릉, 구형왕릉. 이 능은 가락국(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능이다. 구형왕은 신라의 삼국통일 대업을 이끈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다. 한 왕조의 마지막을 맞이한 구형왕이 품은 마지막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꼭 봐야할 풍경
  • 구형왕릉에는 이끼도 끼지 않고 능역 근처까지 뻗어오던 칡넝쿨도 능역 바로 앞에서 다른 곳으로 뻗어 자라며 새도 앉지 않고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진짜 그런지 한번 확인해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로 충분하겠다.
김유신 구형왕릉 시묘살이를 하다

가락국(가야)의 왕족이었던 김유신은 태왕산(지금의 금서면 화계리 왕산) 태왕궁에서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구형왕의 능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태왕궁은 가락국(가야)의 시조인 수로왕 때부터 있었던 궁이었으며 수로왕이 말년에 이곳에서 휴양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니 김유신으로서는 옛 왕조의 시작과 끝의 역사를 간직한 태왕산(지금의 왕산)을 찾아 선조들을 위업과 그 뜻을 기렸던 것이다. 나라는 532년 신라에 양위했지만 그는 가락국(가야)의 후손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가락국(가야)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은 물론 가락국(가야)을 세운 수로왕의 제사까지 받들었다. 나라가 신라와 하나가 됐으니 몸 또한 신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법한 김유신이었다. 이후 그는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할거하던 시절 한반도 남쪽 지역에 뿌리를 둔 가락국 또한 무시하지 못할 세력이었다. 가락국(가야)의 시작은 기원후 42년 정도로 알려졌으니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또한 국가의 형태를 완벽하게 갖추기 이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가락국(가야)은 삼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그 세력을 키워나갔지만 결국 신라에 병합되기에 이른다.

가락국(가야)마지막 왕 구형왕

구형왕은 521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신라는 법흥왕이 다스리던 시절로 군사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던 시기였다. 그만큼 신라의 세력은 막강했으며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가락국(가야)은 그 세력이 신라에 미치지 못했다. 그 무렵 즉위한 구형왕은 신라와 전쟁을 피하고 화친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지만 신라의 생각을 달랐다.

여러 차례 싸움을 겪은 구형왕은 전쟁으로 인해 죽고 피해를 입는 백성을 위해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라를 신라에 양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가락국(가야)을 신라에 양위하고 백성들은 더 이상 신라와의 전쟁에 시달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구형왕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또 다른 설도 전해진다. 구형왕은 신라와 끝까지 싸웠고 태왕산(지금의 왕산) 부근에서 전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구형왕은 죽어가며 “나라를 잃은 죄인이기에 돌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구형왕릉은 돌을 쌓아 만든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칡덩굴도 뻗지 못하는 돌무덤 능역

구형왕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지만 왕릉에 내려오는 전설은 구형왕릉을 더 신비롭게 만든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왕릉의 돌을 헐어버리려고 하자 뇌성벽력이 몰아쳐 왜구가 도망했다고 전해진다.

또 깊은 산속임에도 칡넝쿨이 능 근처까지는 뻗어 오다가도 능역 바로 앞에서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 뻗어나가며, 새들이 능 위에 앉지 않고 낙엽 또한 능 밖으로 날려 떨어진다는 것이다.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구형왕릉은 1971년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돌을 쌓아 만든 왕릉이며 높이가 7.15미터다.

가락국(가야)대해서

가락국(가야)은 서기 42년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그 시조는 김수로이며 건국 설화가 전해진다. 서기 42년 어느 날 하늘에서 빨간 보자기를 묶은 보랏빛 밧줄이 내려왔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보자기를 풀었는데, 그 안에서 금으로 만든 상자가 나타났다. 그 안에는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나왔다. 12일 뒤 알에서 동자가 출현했으니 사람들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따르게 됐다. 동자들이 금빛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김(金)이라는 글자를 앞에 두었고 그 중 가장 먼저 출현한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김수로를 왕으로 모셨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가락국(가야)로 불렀다. 나머지 다섯 동자도 각각 다른 가락국(가야)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 가락국(가야)의 역사는 전기 후기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전기 가락국(가야)의 세력을 이끈 것은 김해를 본거지로 한 금관가야였으며 후기에는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가 중요 세력이었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병합됐고 대가야는 562년에 망했다. 이것이 가락국(가야)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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